들어가며: 그거 SI랑 뭐가 다른가요?
요즘 스타트업 채용 시장에서 FDE라는 포지션을 자주 봅니다. 포워드 디플로이드 엔지니어(Forward Deployed Engineer)의 약자로, 고객의 현장에 직접 들어가 문제를 함께 풀면서 개발하는 엔지니어를 말합니다.
완전히 새로운 개념은 아닙니다. 2006년 팔란티어에서 시작된 방식인데, 최근 AI 기업들이 고객 도입을 돕기 위해 FDE 팀을 꾸리면서 다시 주목받고 있습니다. 링크드인 기준으로 FDE 채용 공고가 2023년에서 2025년 사이 42배 늘었다는 분석이 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 포지션 이야기가 나오면 꼭 따라오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게 SI랑 뭐가 다르냐는 것이죠. 저는 이 질문이 꽤 흥미롭다고 생각합니다. 스타트업이 포지션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 오래 해 왔던 생각과 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스타트업은 포지션 이름을 새로 짓는 걸 좋아한다
스타트업은 새로운 일을 하는 만큼, 포지션에도 새로운 이름을 붙이는 걸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마케터 대신 그로스 해커, 인사팀 대신 피플팀처럼요.
대표적인 예가 CSM, 커스터머 석세스 매니저입니다. 제가 이해하기로는 기존의 고객 서비스 담당자를 조금 비틀어 만든 포지션입니다. 문의에 응대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고객이 우리 제품으로 실제 성과를 내도록 돕겠다는 뜻을 이름에 담은 거죠. 그 의도 자체는 좋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CSM은 이름만 바꾼 고객 서비스가 아니라는 반론도 있습니다. 문의를 기다리는 대신 먼저 고객의 신호를 살피고, 계약 갱신과 확장 매출까지 책임지는 다른 직무라는 것이죠. 저도 이 직무가 의미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름을 새로 짓는 것과 그 이름대로 일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고 봅니다.
이름이 핑계가 되는 순간
스노우플레이크 회장이었던 프랭크 슬루트먼은 책 『Amp It Up』에서 고객 성공 조직을 꽤 날카롭게 비판합니다. 고객의 성공은 모두의 일이고, 고객의 성공을 가로막는 제품과 지원의 근본 문제를 고쳐야지 고객 성공 조직을 반창고처럼 써서는 안 된다는 취지입니다.
저는 이 대목에 많이 공감했습니다. 실무에서 비슷한 장면을 자주 봤기 때문입니다. 고객 성공을 중시하겠다고 CSM을 만들었는데, 시간이 지나면 고객 성공은 CSM이 챙길 일이 됩니다. 그리고 CSM이 제 기능을 못 하는 순간, 고객 성공에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이상한 팀이 되어 버립니다. 고객에게 가까이 가려고 만든 이름이 오히려 고객에게서 멀어지는 핑계가 되는 셈입니다.
원래 포지션은 조직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모인 사람들의 역할 범위를 정하는 편의적인 개념이어야 합니다. 흔히 말하는 R&R, 즉 이 사람이 무엇을 했을 때 성과를 냈다고 볼지 정하는 장치죠. 그런데 그 경계선이 여기까지만 내 일이라는 벽으로 바뀌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습니다.
반대로 모두의 일은 결국 아무의 일도 아니게 되기 쉽다는 지적도 타당합니다. 영업 담당자가 신규 계약을 따내면서 계약 이후의 성과까지 챙기기는 어렵고, 슬루트먼의 주장은 제품이 시장에 잘 맞았던 스노우플레이크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나온 것이라는 반박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전담 포지션을 없애자는 쪽은 아닙니다. 전담자가 있다는 사실이 나머지 사람들의 무관심을 정당화하는 순간이 위험하다고 보는 쪽입니다.
축구도 처음엔 모두 공격수였다
제가 좋아하는 만화 『블루록』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축구는 원래 11명 모두 공격수에서 출발했고, 엄청난 공격수가 나오자 그를 막으려고 수비수가 생기고, 그를 돕기 위해 미드필더가 생기면서 포지션이 나뉘었다는 것입니다.
궁금해서 찾아보니 실제 역사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1870년대 초기 축구에서는 1-1-8처럼 공격수가 대부분인 진형을 썼고, 균형 잡힌 2-3-5 진형은 1890년대에 들어서야 퍼졌다고 합니다. 포지션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던 게 아니라, 필요할 때마다 나뉜 것이죠.
그렇다면 아예 포지션을 없애면 어떨까요. 실제로 그런 시도를 한 회사도 있습니다. 미국의 온라인 신발 쇼핑몰 자포스는 2015년 직급과 직함을 없애는 홀라크라시를 도입했는데, 그 과정에서 전체 인원의 약 18%가 회사를 떠났습니다. 포지션을 완전히 없애는 것도 답은 아니었던 셈입니다.
전문화가 생산성을 높인다는 건 경제학의 오래된 결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포지션을 나누는 것 자체를 문제 삼지 않습니다. 축구의 수비수도 필요해서 생겼으니까요. 다만 수비수가 생겼다고 나머지 선수들이 수비를 안 해도 되는 건 아니라는 점, 그 지점을 말하고 싶습니다.
예전에 누구나 공격수가 될 수 있다라는 짧은 글에서 세일즈·마케터·CSM을 공격수·미드필더·수비수에 빗대는 비유가 싫다고 쓴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어설프게 포지션을 나누기보다 모두가 공격수가 되는 팀이 낫다고 했는데, 지금은 포지션은 나누되 그 포지션을 만든 이유를 모두가 공유하는 쪽으로 생각이 조금 정리됐습니다.
포지션 이름에는 철학과 태도가 담긴다
그래서 저는 포지션 이름이 어느 정도는 말장난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름을 정하는 순간 담기는 철학과 태도는 말장난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라고 봅니다.
다시 FDE와 SI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겉으로 보면 둘 다 고객사에 가서 맞춤 개발을 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FDE를 이야기하는 쪽에서는 현장에서 발견한 제품의 한계를 우회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본사 제품에 반영해 다음 고객도 쓰게 만든다는 점, 투입한 시간이 아니라 고객이 얻은 결과로 평가받는다는 점을 차이로 꼽습니다.
결국 FDE라는 이름은 이 일을 하는 사람들의 권위를 세워 주고, 이제는 이렇게 일하는 것이 잘하는 방식이라고 보여 주는 장치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이름이 사람의 태도를 바꾼다는 근거도 있습니다. 직원들이 자기 일의 가치를 담아 직함을 스스로 짓게 했더니 정서적 소진이 줄었다는 연구도 있습니다.
사실 고객 현장에 뛰어드는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닙니다. 도요타는 오래전부터 직접 현장에 가서 실물을 보라는 현지현물 원칙을 강조해 왔고, 쿠팡 로켓배송도 초기에는 물류 경험이 없는 팀이 현장에서 직접 부딪히며 시스템을 설계했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이런 노력을 자본과 인력으로 감당했다면, 지금은 AI가 그 비용을 크게 낮춰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AI 제품은 고객의 실제 업무에 붙여 보기 전까지 가치를 증명하기 어렵다 보니, 현장에 들어가지 않으면 큰일 나는 상황이 됐습니다. FDE라는 이름이 다시 떠오른 배경이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물론 FDE도 결국 비싼 인건비를 들인 용역이고, 고객을 특정 회사의 시스템에 묶어 두는 장치라는 비판이 있습니다. 실제로 FDE 관련 설명의 상당수가 FDE 서비스를 파는 회사에서 나온다는 점도 감안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름만 FDE이고 현장의 발견이 제품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그건 말 그대로 이름만 바꾼 SI일 겁니다. 이름에 담긴 철학을 실제로 지키느냐가 둘을 가르는 기준이라고 생각합니다.
포지션이 만드는 두 가지 함정
제가 굳이 이 이야기를 길게 한 이유는, 새로운 포지션이 생길 때마다 반복되는 두 가지 함정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는 포지션의 신격화입니다. FDE를 뽑기만 하면 고객 문제가 풀릴 거라고 믿는 것처럼, 이름만 들여오면 일하는 방식도 따라올 거라고 기대하는 것이죠. 하지만 이름은 철학을 담는 그릇일 뿐이고, 그 철학대로 일할 환경이 없다면 새 이름은 금방 빛을 잃습니다.
두 번째는 나는 그 포지션이 아니니까 하고 선을 긋는 태도입니다. 고객 현장은 FDE가, 고객 성공은 CSM이 챙길 일이라고 여기는 순간, 전담자의 존재가 나머지 사람들이 손을 떼는 핑계가 됩니다.
모두가 모든 일을 챙기라는 건 현실적이지 않다는 반론도 있을 겁니다. 그래서 제가 바라는 건 모두가 같은 일을 하는 조직이 아니라, 포지션은 나누되 그 포지션을 만든 이유는 모두가 공유하는 조직입니다. 축구로 치면 공격수도 수비 상황에서는 뛰고, 수비수도 기회가 오면 골문 앞으로 올라가는 팀이죠.
새로운 포지션 이름을 볼 때 저는 SI랑 뭐가 다르냐는 질문보다 이 질문을 먼저 던져 보려 합니다. 이 이름은 어떤 태도로 일하겠다는 약속이고, 그 약속은 이 포지션이 아닌 나와도 관련이 있는가.
참고 자료
- The FDE Arms Race (Tomasz Tunguz)
- Forward-Deployed Engineers vs. Implementation Consultants (SD Times)
- What is a Forward Deployed Engineer, Anyway? (Fourth Age)
- The one thing billionaire Frank Slootman got wrong (Gainsight)
- 1-1-8: The oldest formation in football history (Sportskeeda)
- Zappos holacracy losing employees (Fortune)
- Job Titles as Identity Badges (Grant, Berg & Cable, 2014)
- 10년 전, 쿠팡은 어떻게 49일만에 로켓배송을 내놓게 됐나 (바이라인네트워크)